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문단 편집) == 영향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은 말버러 공작([[존 처칠]])의 맹활약 덕분에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기존의 영국령 캐나다와 새로 얻어낸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를 기점으로 향후 [[7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해 캐나다를 석권하게 되었고, [[지브롤터]]를 얻음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국의 지중해 방면으로의 영향력 투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약 토리당이 스페인보다 프랑스를 억제하는 전쟁을 우선시했을 경우 프랑스는 재정위기로 전쟁을 중단해야 할 상황이었을 정도로 프랑스를 압도한 영국은 이 전쟁에서 전 유럽에 영국의 강력함을 과시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영토 대부분이 직접적인 전쟁터가 된데다 지중해-이탈리아 일대의 영토를 대거 상실한 스페인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사실 스페인은 이후에 얼마 못가 금방 세력을 회복했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네덜란드였다. 장벽이 약간 넓어진 것 빼고는 아무런 영토적,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했고 돈과 인력은 많이 썼는데 이득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후로 네덜란드는 유럽 열강에서 탈락했고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니라 국가로서의)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 소유였던 스페인이 이제는 원수 가문인 [[부르봉 왕조]]에게 떨어지게 되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영토인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하여 영토상으로는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다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지방은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결과 스페인이 다시 탈환했다. 스페인 펠리페 5세의 5남 카를로스가 프랑스, 사르데냐와 연합하여 이탈리아 남부의 [[황제군|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 국왕(카를로 4세), 나폴리 국왕(카를로 6세)으로 즉위했다. 카를로스가 1759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이곳은 카를로스의 삼남 [[페르디난도 1세|페르디난도]]가 승계받아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지배가 계속 이어진다. 프랑스는 200여년 동안 프랑스를 괴롭혔던 합스부르크 포위망을 탈출했고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를 안착시켰기 때문에 전쟁 목표를 완벽히 달성했으나 재정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을 입었고 한동안 내부 안정에 주력해야 했다. 이 전쟁이 불러온 최대의 나비효과는 왕국으로 선포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사보이아 공국]]이다. 브란덴부르크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을 통합하여 단일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고 본격적으로 유럽 무대에 등장하였다. 사보이아 공국 또한 이 전쟁으로 얻은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가 얻은 [[사르데냐]]와 교환하고[*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강요로 인해 교환했다. 다만 시칠리아는 이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다시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본격적으로 [[사르데냐 왕국]]이란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150여년 후 [[민족주의]]의 중심에 서게 된 [[호엔촐레른 가문|왕]][[사보이아 가문|가]]들을 만든 전쟁으로, 두 나라는 각각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으로 발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